미역골의 어느 밤
미역골의 어느 밤
  • 윤명희 기자
  • 승인 2020.04.0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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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골의 어느 밤

윤명희

   잘못 들었나? 문고리 소리 같긴 한데 뭐지? 산비둘기 소리에도 숨이 넘어갈 듯이 짖곤 하던 복돌이 녀석은 오늘따라 조용하고, 풍경이 대신 온몸으로 운다. 바람이 분다고 쇠 문고리까지 움직일 리는 없을 텐데. 다시 달그락달그락, 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는 소리다. 귀는 바깥에 두고 이불을 끌어 덮었다. 발가락이 오그라진다.

   뜨끈한 바닥에 등을 대고 싶어 하는 남편은 안방에, 침대를 고수하는 나는 건넌방에서 잔지 꽤 됐다. 우리 집은 뒷산이 울이요, 앞산이 담이다 보니 슬쩍 걸어둘 만한 사립문도 없다. 창호지 방문 하나만 열면 마루가 있고 뜰을 내려서면 마당인 촌집에서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지만 보이지 않는 소리에는 여전히 민감하다. 누구냐고 인기척을 내면 방문을 제치고 덮칠 것만 같아 조용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안방에서 휴대폰이라도 가져왔으면 문밖의 불청객 모르게 전화라도 해서 남편을 깨울 텐데. 허술한 잠금장치가 떠오르자 벗은 몸이 돌아 보였다. 이불을 김밥 말듯이 둘둘 감았다. 선뜻 문을 열지 않고 서성이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처마 끝에 달린 풍경만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다.

   마당에 깔린 자갈 밟는 소리에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옷을 찾아 팔을 끼웠다. 그것이 방문 앞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한 것은 잠시였다. 다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얼른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리가 펴지지 않는다. 내가 먼저 문을 확 열어 마당으로 나가떨어지게 할까? 동네가 떠나가도록 고함을 지르면 남편이 달려오겠지? 난투극이 벌어지면 어쩌지?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이 흉기라도 들었다면 상대가 안 될 텐데. 고함이 옆집에까지 가기는 할까? 혹시 장작 패던 자리에 있던 도끼를 본 건 아니겠지? 어휴, 연장은 창고에 잘 두라고 했건만. 낫도 마루 밑 장작 옆에 던져둔 것 같던데. 저 방은 조용한 걸 보니 아직 그 방 앞엔 가지 않았나 보네. 숨소리도 내지 않으면 내가 이 방에 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거야.

한옥=사진은 작품과 관련없음(출처: Google.com)
한옥=사진은 작품과 관련없음(출처: Google.com)

 

   마른 침 넘기는 소리가 양쪽 귀를 파고든다. 베개로 머리를 감쌌다. 댓잎 부딪치는 소리가 풍경의 쉰 울음소리를 앗아 갔다가 내놓기를 반복한다. 기다리는 아침은 자꾸만 뒷걸음질 친다. 밤새 문고리 소리와 사투를 벌이다 깜빡 잠이 들었다.

   문살 사이로 뿌연 창호지가 어둠의 전령이 물러났다고 한다. 방문을 박차듯이 열었다. 마루에 발을 내딛자 화르르 떨어지는 텃밭 끝자락의 벚꽃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세상 예쁜 날, 저 먼저 져야 하는 것이 서러워 꽃비를 날린다. 그 아래 노란 양지꽃이 벚꽃의 설움을 하얗게 덮어쓰고 있고, 보랏빛 현호색이 작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다. 밤새 조문하느라 지친 풍경이 뎅그렁거리자 방문 앞에 내려 둔 갈대발이 문고리를 툭 쳤다. 벚꽃의 풍장을 한다고 그 밤 내내 문고리를 흔들어도 도시의 때를 벗지 못한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마당 끝자락에 있는 산이 두어 걸음 성큼 다가오며 벚꽃을 달랜다. '괜찮아, 꽃 피는 시절만이 인생이 아니란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지.' 벚꽃이 대답하듯이 화르르 떨어진다. 그제야 말없이 지는 진달래가 보이고 떼 지어 꿈틀거리는 연둣빛 산등성이가 보인다. 마당 언저리에는 개불알꽃이 작은 눈을 깜빡이며 영역을 넓히느라 바쁘다. 땅에 바싹 붙었던 황새냉이가 밤새 한 뼘은 더 컸다. 봄이 봄을 밀고 가는 소리에 귀가 간지럽다. 아침 햇살이 산을 넘어 오기도 전인데 소쩍새가 벌써 온몸으로 우는 걸 보니 오늘 밤도 잠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소쩍새 소리에 또 꽃은 지고 피고.

*윤명희: 대구에서 태어나 현대수필 등단 했으며 저서로는 《경상도 우리 탯말》(공저), 에세이 《말대가리 뿔》 그리고 3인수필선집인  《다만, 오직, 그냥》등이 있으며 지금은 경주에서 부군 배씨 아저씨와  '배가벌꿀'을 농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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